‘같은 값이면 한국 잔류’는 옛말…이찬솔 미국행이 남긴 교훈

‘같은 값이면 한국 잔류’는 옛말…이찬솔 미국행이 남긴 교훈

편집부

[베이스볼코리아]

어제 ‘베이스볼코리아’가 단독 보도한 대로 서울고등학교 우완투수 이찬솔의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 행이 임박했습니다. 이찬솔은 지난 주말 보스턴 구단과 계약에 합의했고, 현재 미국으로 출국해 메디컬 테스트를 앞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큰 이상이 발견되지 않으면 공식적인 보스턴 소속 선수가 됩니다.

이찬솔은 최고 154km/h 강속구를 던지는 우완 정통파로, 올해 고교야구에서 장현석(마산용마고) 다음가는 파이어볼러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2학년인 지난해부터 여러 빅리그 구단의 관심을 받았고, 이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접근해온 보스턴 구단과 손을 잡았습니다. 보스턴 구단은 이찬솔의 좋은 신체조건과 부드러운 투구폼에 매력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 측근은 “이찬솔의 성향과 성격이 미국 야구와 잘 맞을 것 같다는 초중고 지도자들의 조언을 고려했다. 무엇보다 큰 무대에서 경쟁하고 싶은 선수 본인의 의지가 강했다”고 ‘베이스볼코리아’에 귀띔했습니다.

이찬솔의 계약금은 과거 한국인 메이저리거들과 비교하면 그렇게 큰 액수는 아닙니다. 최소 30만 달러에 교육비 등 여러 플러스알파가 붙는 조건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때문에 야구계에서는 이찬솔의 미국행 결정이 다소 의외라는 반응도 적지 않습니다. 이찬솔은 올해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상위 지명이 유력한 선수였습니다. 한 지방 구단 스카우트는 “1라운드 6~7번 지명을 예상했다”고 했습니다. 이 순번 지명자에겐 대개 계약금 2억 2000만 원~2억 5000만 원 정도가 주어집니다. 반면 보스턴에서 제시한 계약금은 현재 환율 기준 약 3억 8000만 원 정도입니다.

과거에는 1라운드급 유망주가 이 정도 계약금에 미국행을 택하는 경우는 좀처럼 보기 드물었습니다. 선수들은 비슷한 값이면 생활 환경이 편리하고 따로 언어·문화 적응이 필요없는 국내에 남는 쪽을 선호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성공 확률이 높은 KBO리그를 제쳐놓고, 고생길이 뻔한 마이너리그행을 택할 유인이   크지 않았습니다.

한 에이전시 관계자는 “해외 진출 선수에게 주어지는 ‘한국 복귀 시 2년 유예’ 제약도 선수들이 미국행을 망설이는 요인 중 하나였다. 그보다는 일단 KBO리그에서 데뷔해 성공을 거두고, 포스팅을 통해 미국행을 노리는 게 합리적인 선택으로 여겨졌다”고 전했습니다. 야구계에서는 “계약금을 100만 달러 이상 받지 못하면 한국에 남는 편이 낫다”는 말이 정설로 통했습니다. 이 때문인지 지난해 조원빈(약 50만 달러), 심준석(약 75만 달러)의 미국 진출 소식이 전해진 뒤 야구계 일각에선 “헐값 계약”이란 부정적 평가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야구 사정에 밝은 전문가, 관계자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메이저리그 사정에 정통한 야구 관계자는 “미국에 가려면 100만 달러가 마지노선이라는 건 옛날 얘기”라며 “계약금의 가치가 과거와 달라졌다. 올해부터는 50만 달러 이하에 미국행을 선택하는 선수가 많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관계자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국제 유망주 계약금 풀을 타이트하게 관리하고 있어, 과거처럼 100만 달러 이상 대형 계약이 나오기 어려운 여건이다. 50만 달러만 받아도 국제 유망주 중에선 상위권이고, 30만 달러면 중간 수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과거엔 100만 달러를 받아도 에이전트 피와 생활비 등을 떼고 나면 실제 손에 쥐는 금액은 절반 정도였다. 이제는 50만 달러를 받아도 대부분이 선수에게 돌아간다. 50만 달러가 과거의 100만 달러 계약과 비슷한 가치를 갖게 됐다. 여기에 최근 달러가치가 크게 오른 것도 선수 입장에선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전했습니다.

올해부터 마이너리그 환경이 크게 개선된 것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MLB 사무국과 선수노조는 지난 3월 정규시즌 개막을 앞두고 마이너리거 처우 개선을 포함한 새 단체 교섭 계약(CBA)을 맺었습니다. ‘역사적 합의’라는 평가를 받는 이 CBA 체결로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급여가 기존 대비 2~3배 인상됐고, 의료 및 연금 혜택도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한 에이전시 대표는 “마이너리그 하면 떠오르는 ‘눈물 젖은 빵’은 이제 옛날 얘기가 됐다. 이제는 마이너리그 선수들도 좋은 식단과 훈련 환경, 주거 시설을 받으면서 운동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에이전시 관계자도 “이전과 많이 달라진 게 눈에 띈다. 루키리그 단계부터 호텔 음식을 제공하고, 통역도 구단 비용으로 해결한다”고 전했습니다. 이찬솔 측도 명문 구단 보스턴의 훌륭한 환경과 시설, 시스템에 매력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 마이너리그에서 빅리그 데뷔까지 걸리는 시간이 단축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한 메이저리그 구단 스카우트는 “과거보다 유망주들이 빅리그 데뷔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아졌다”면서 “코로나19 이후 진행된 ‘마이너리그 슬림화’의 효과”라고 설명했습니다. 과거 빅리그 구단들은 최소 7개 이상의 마이너리그 구단을 보유했습니다. 가급적 많은 유망주를 모아놓고 이 중에서 살아남는 선수에게 기회를 주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대대적인 마이너리그 개편이 진행되면서, 지금은 대부분 구단이 5개 마이너리그팀만 보유하게 됐습니다. ‘무제한 지명’이었던 신인드래프트도 올해부터 20라운드로 제한이 생겼습니다. 다소 방만하게 운영했던 마이너리그 시스템을 보다 효율적이고 압축적으로 개선한 것입니다.

앞의 스카우트는 “과거 마이너리그팀에는 유망주라고 보기 힘든 선수들도 상당히 많았다. 빅리그에 올라갈 가능성이 거의 없는 다수가 극소수 유망주의 성장을 위해 존재하는 시스템이었다”면서 “이제는 정말로 빅리그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는, 실링이 높은 유망주들만 엄선해서 모아놓고 집중적인 육성이 이뤄진다”라고 했습니다. 실제 올해 고교 ‘최대어’로 꼽히는 장현석의 경우, 일부 메이저리그 구단에서는 “미국 진출 시 2025년 데뷔도 가능하다”고 평가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예전보다 좋은 환경에서 과학적-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면서, 단기간에 마이너리그를 졸업해 빅리그 데뷔까지 이룰 수 있다면, 선수 입장에선 미국 직행에 매력을 느낄 만한 이유가 충분합니다.

이찬솔은 올해 고교야구에서 장현석 다음가는 강속구 유망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사진=베이스볼코리아)

앞의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는 “이찬솔 이후에도 추가로 미국 진출을 선택하는 선수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과거 기준으로는 ‘헐값’에 해당하는 계약금을 받고 미국에 도전하는 선수가 점점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만약 이 예상대로 된다면 국내 구단들에겐 큰 악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이찬솔에 이어 ‘1순위’ 장현석까지 미국 진출을 선택한다면, 1라운드 후보 중에 2명이 사라지는 셈입니다. 장현석은 현재 여러 메이저리그 구단으로부터 100만 달러 안팎의 오퍼를 받은 상태이며, 이번 주 안에 미국행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 구단 관계자는 “최근 열린 KBO 이사회에서 모 구단이 ‘포스팅 신청 자격을 7년에서 6년으로 줄이자’는 취지의 제안을 했지만, 다른 구단들의 거센 반대로 거둬들여야 했다”면서 “그러나 앞으로 유망주들의 미국행 흐름이 계속된다면, 진지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야구 유망주들이 보기에 KBO리그가 메이저리그에 비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KBO 1라운드 신인 계약금은 10년 가까이 3억 원 수준에서 ‘동결’된 상태입니다. 과거보다 많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KBO리그의 훈련 환경과 시스템, 지도자들의 실력은 메이저리그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여기에 최근 터진 ‘SSG 2군 선수단 폭력 사태’에서 드러난 것처럼, 무늬만 프로일 뿐 여전히 구시대 관행이 남아있는 게 한국야구의 현실입니다. ‘MZ 세대’ 선수들이 개인의 개성과 자율을 존중하는 미국야구에 매력을 느끼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겁니다. 미국 진출을 막으려고 ‘2년 유예조항’ 등의 족쇄를 채우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그보단 야구 유망주들에게 ‘매력적인’ 리그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우선해야 합니다. 한국야구의 제도, 환경은 물론 야구 문화까지 모든 부면에서 변화가 필요합니다. 한 유망주의 미국 진출이 한국야구에 남긴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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